🏛 다리가 하나인 정승, 윤지완의 이야기

📜 서론 – 청백리의 상징, 그러나 ‘일각 정승’
조선 숙종 시기, 한 명의 정승이 백성들에게 특별히 기억되었습니다.
그는 청렴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청백리(淸白吏)에 선정되었고, 대신들 사이에서도 ‘곧은 사람’으로 알려졌습니다.
그의 이름은 윤지완(尹趾完, 1635~1718).
하지만 사람들은 그를 ‘일각(一脚) 정승’이라 불렀습니다.
이 별명은 정치적 비유가 아니라 실제 한쪽 다리를 잃은 신체적 장애에서 비롯되었습니다.
🧍 출생과 가문
윤지완은 파평 윤씨로, 명문가 출신이었습니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문신을 배출했지만, 그가 살던 시기는 조선 정치가 특히 파벌싸움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였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했고, 글씨와 문장에 뛰어나 30대 초반에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에 올랐습니다.
⚔ 한쪽 다리를 잃게 된 사연
윤지완이 장애를 갖게 된 이유는 동상(凍傷) 때문이었습니다.
혹독한 겨울, 관직 수행 중 먼 길을 가던 그는 발에 심한 동상을 입었고, 치료가 늦어져 무릎 아래를 절단해야 했습니다.
이 일로 평생 목발과 지팡이에 의지해 걸었고, 정승이 된 이후에도 목발을 짚은 채 조정 회의에 참석했습니다.
조선 시대는 장애에 대한 편견이 강했지만, 그는 이를 의연하게 받아들이며 벼슬길을 계속 이어갔습니다.
🏛 관직 생활 – 청백리로 불린 이유
윤지완은 숙종 시대 좌의정과 영의정을 지냈습니다.
그는 벼슬살이 내내 사적인 청탁을 거절했고, 재산을 불리지 않았습니다.
사후에 조정에서 청백리로 추증될 만큼 재물에 욕심이 없었고, 퇴직 후에는 관청에서 받은 녹봉 외에는 남는 재산이 거의 없었다고 전해집니다.
📌 유명한 일화 ① – ‘다리 하나로도 나라를 섬긴다’
한 번은 숙종이 궁궐 마당에서 윤지완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다리가 하나인데도 힘든 벼슬을 계속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윤지완은 미소 지으며 대답했습니다.
“신에게 두 다리가 있든 하나가 있든, 나라를 섬기는 마음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이 대답에 숙종은 크게 감탄하며, 그의 자리에 대한 신임을 거두지 않았다고 합니다.
📌 유명한 일화 ② – 뇌물 거절 사건
어느 날, 지방 수령이 승진 청탁을 하며 귀한 약재와 금품을 윤지완 집에 보냈습니다.
그는 즉시 물품을 돌려보내며 “나라의 벼슬은 금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라는 글을 써 보냈습니다.
이 편지는 후대에까지 전해져 지방 관료들 사이에서 청렴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 당쟁 속의 윤지완
윤지완이 활동한 시기는 서인과 남인, 노론과 소론이 격렬하게 대립하던 숙종 연간입니다.
그는 파당의 이익보다 국가의 안정을 우선시했으며,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때로는 양쪽 모두의 불신을 받게 하였고, 몇 차례 관직에서 물러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숙종은 위기 때마다 그를 불러 중용했습니다.
🪵 신체적 불편 속의 정치 활동
윤지완은 한쪽 다리가 없어도 하루 종일 조정에서 업무를 봤습니다.
지팡이를 짚고 경복궁의 긴 복도를 오가는 모습은 당시 젊은 관리들에게 “나라를 위한 헌신의 상징”으로 회자되었습니다.
또한, 그는 장애로 인해 군사 행차에는 참여하지 못했지만, 대신 군수품 조달과 정책 결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 윤지완 생애 주요 연표
| 연 도 | 나 이 | 사 건 |
| 1635 | 1세 | 출생, 파평 윤씨 가문 |
| 1661 | 27세 | 과거 급제, 관직 시작 |
| 1670년대 | 35세~ | 지방 수령, 중앙 관직 역임 |
| 1680년대 | 45세~ | 동상으로 한쪽 다리 절단 |
| 1690년대 | 55세~ | 좌의정, 영의정 역임 |
| 1710년대 | 75세~ | 청백리로 추증, 은퇴 |
| 1718 | 84세 | 사망 |
📚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 후학 양성: 윤지완은 벼슬에서 물러난 뒤 젊은 선비들을 모아 경전을 강독하며 올바른 정치관을 심어주었습니다.
- 민생 개혁 주장: 당시 백성들이 세금 부담에 시달리자, 균세제 개혁안을 숙종에게 여러 차례 건의했습니다. 비록 전면 시행되진 못했지만, 일부 지역에서 시범적으로 시행되었습니다.
- 평생 무후(無後): 자녀가 없었지만, 사후 양자를 들여 가문을 잇게 했습니다. 재산 대부분은 친척과 가난한 유생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 윤지완이 남긴 유산
윤지완은 단순히 ‘다리가 하나인 정승’이 아니라,
장애를 딛고 조선 정치의 중심에서 청렴과 헌신을 보여준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삶은 오늘날 장애와 능력은 별개임을 증명하며, 역사 속에서 중요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 마무리
윤지완의 이야기는 단순한 전기(傳記)가 아니라, 장애를 극복하고 나라를 위해 헌신한 한 인간의 기록입니다.
그가 목발을 짚고 궁궐을 오가던 모습은 3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울림을 줍니다.
“다리는 하나라도, 충성은 두 다리보다 더 굳건하다.”